▲ 정기훈 기자

노조에 회계 서류를 제출하라는 고용노동부 요구가 법·제도적 근거가 부족한 상태에서 이뤄졌다는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노동부는 회계 서류 등의 비치·보존 여부를 확인하겠다며 자료 제출을 요구했지만, 정작 노동부 업무매뉴얼의 ‘자료제출 요구 사유’에는 적시돼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행정관청이 노조에 결산결과와 운영상황 보고를 요구할 수 있다고 명시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관련 조항을 무리하게 적용한 탓에 ‘행정관청의 자의적이거나 과도한 남용’을 경계한 헌법재판소 결정을 위배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류 비치·보존 이행 여부 확인한다더니
근로감독관 매뉴얼상 자료제출 사유와 ‘불일치’

22일 <매일노동뉴스>가 노동부의 ‘집단적 노사관계 업무 매뉴얼’을 살펴봤더니 노조법 27조를 적용할 때 자료제출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불분명했다. 매뉴얼은 지난해에 발간한 것이다. 노조법 27조에는 “노동조합은 행정관청이 요구하는 경우에는 결산결과와 운영상황을 보고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노동부는 이를 근거로 노조의 서류 비치·보존 이행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회계 장부의 표지·내지 등을 증빙자료로 제출하라고 이달 1일 양대 노총 등에 요구했다.

매뉴얼에는 자료제출을 요구할 수 있는 사유를 예시했다. 구체적으로 보면 △노조에 대해 진정·고발·청원 등이 있을 경우 △노조의 조직분규가 있어 이를 조정할 필요가 있을 경우 △노조의 회계·경리 상태나 기타 운영에 대해 지도할 필요가 있는 경우다. 서류 비치·보존 이행 여부는 명시돼 있지 않다.

노동부는 해당 매뉴얼의 세 가지 예시는 과거에 이뤄진 자료 제출 요구 사례 등을 소개한 것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그 밖의 다른 사유로도 자료 제출을 요구할 수 있다는 얘기다. 노동부 관계자는 “노조는 회계 서류 등의 비치·보존 의무가 있고, 이런 중요한 노조 운영상황의 이행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노조법 27조에 따라 자료 제출을 요구한 것”이라며 “매뉴얼은 기존의 사례를 예시로 든 것이고, 27조가 적용될 수 있는 사례는 매우 많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매뉴얼상의 세 가지 사유 외에도 노조법 27조를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 있다는 노동부 견해는 또 다른 논란을 낳을 것으로 보인다. 노조에 대한 행정관청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법·제도를 개선해 온 그간 노조법 흐름에 역행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행정관청 개입 최소화 법개정 역사에 ‘역행’

헌법재판소는 이미 2013년 이 같은 우려를 지적한 바 있다. 옛 운수노조(현 공공운수노조)는 2012년 규약·총회·대의원대회 회의록을 제출하라는 노동부 요구를 이행하지 않고, 노조법 27조가 행정관청의 과도한 개입을 초래한다며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이듬해 7월 헌재는 “노동조합의 재정 집행과 운영에 있어서의 적법성, 민주성 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조합자치 또는 규약자치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며 “행정관청의 감독이 보충적으로 요구(된다)”고 합헌 결정했다.

해당 결정에서 헌재는 노조가 조합원에게 공개해야 하는 ‘결산결과와 운영사항’과 행정관청에 보고해야 할 ‘결산결과와 운영사항’은 동일한 서류라고 판단했다. 조합원이 볼 수 있는 회계 관련 서류를 행정관청이 요구하면 제출해야 한다는 취지로 해석할 수 있다. 회계서류를 정부에 제출해야 할 법률적 근거가 없다는 노동계 주장과 충돌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이 같은 결정을 하면서 그 근거로 “사건 법률조항(노조법 27조)이 행정관청에 의해 자의적이거나 과도하게 남용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며 “모든 노동조합에 대해 일률적인 보고의무를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행정관청이 필요하다고 인정한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보고의무를 부과하고 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주로 진정·민원제기 등이 있을 때에야 자료 제출을 요구하고 있는 등, 정부가 노조법 27조를 함부로 적용하지 않고 있었던 당시 상황을 합헌 결정 배경으로 삼은 셈이다.

최근의 ‘노조 회계 논란’은 뚜렷한 계기나 배경이 있지 않다. 지난해 12월18일 고위 당정협의회에서 한덕수 국무총리가 “노조 재정운용의 투명성 등 국민이 알아야 할 부분을 과감성 있게 요구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수면에 떠 올랐다. 같은달 9일까지 파업한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 등 노동계 압박을 노렸을 가능성이 높다.

노조법 27조 적용 수위를 높이는 노동부 조치가 노조법 개정 역사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다.

해당 조항은 행정관청에 업무조사권을 부여하던 것에서 ‘보고’를 요구하는 것으로 수위를 낮춰 개정된 역사가 있다. 권두섭 변호사(직장갑질 119 대표)는 “노태우 군사정권이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를 탄압할 때 노조법 27조를 활용했다”며 “정부는 노조 회계·재정상 문제에 대한 진정이나 민원 등이 있을 때 발동해야 할 27조를 지금 노조를 탄압하는 데 활용하며 역사를 거꾸로 돌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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